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샤를 드골 (문단 편집) === 야전 군인 시절 === 고등학교를 졸업한 드골은 1909년 생시르 [[육군사관학교]]에 입학했다.[* 제5공화국 유일의 비 [[국립행정학교]], 비 [[그랑제콜]] 출신인 대통령이다.] 그러나, 자부심이 강한 성격과 큰 키 때문에 동기들에게 '꺽다리 황제', '[[아스파라거스]]' 등으로 불리며 놀림받았다. 이런 동기들 중에서 가장 친했던 이들이 훗날 [[자유 프랑스]]의 주요 지휘관이 되는 앙투안 베투아르(Antoine Béthouart)와 알퐁스 쥐앵(Alphonse Juin)이다. 191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[[보병]] [[소위]]로 임관한 드골은 훗날 [[제1차 세계 대전]]의 영웅으로 부상하는 [[필리프 페탱]] 보병 [[대령]]의 지휘하의 아라스 제33보병연대에 배치된다. 이후 [[제1차 세계 대전]] 때 [[대위]]로 [[베르됭 전투]]에 참가했으나, 부상을 입고 32개월 동안 [[독일 제국군|독일군]]의 포로로 잡혀 있었다. 이때 5번의 탈출을 시도했으나, 196cm의 장신[* 20세기 중반보다 평균 신장이 커진 현재에도 거인 수준으로 보일 정도의 큰 키이니, 당시의 키면 말 다한 수준이다. 196cm이면 독일 남성 기준 상위 1%로 눈에 띄는 건 당연하다. 꽤 자주 보인다고 인식하는 이유는 도시의 중심가는 유동인구가 많으니 일어나는 일종의 착시다.] 탓에 변장할 옷을 구할 수 없는 등 잡다한 문제로 모두 실패했다.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포로에 대한 대우는 신사적이어서, 잦은 탈출 시도에도 불구하고 [[독방]]형으로 끝났다. 또한 이때 [[제정 러시아]] 육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힌 [[미하일 투하쳅스키]]와 친구가 되었다.[* 드골과 달리 1917년에 탈출하는데 성공한다. 훗날 투하쳅스키는 [[소련군]]의 총참모장이 되었지만, [[스탈린]]에게 숙청당했다.] 또 다른 인물로는 조르주 카트루(Georges Catroux)가 있는데, 당시 육군 [[중령]]이던 카트루는 드골의 군사적 식견과 사상에 감명을 받았고, 훗날 [[자유 프랑스]]에 가담해 드골보다 상급자임에도 드골을 충실히 따랐다. 종전 직후 육군 [[원수(계급)|원수]]가 된 페탱의 부관으로 복무했고, 후에는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의 교관을 맡았다. 그러나, 자부심이 강하다 못해 오만하다고도 평가받는 성격 탓에 근무고과가 나빠 10년 이상을 대위에 머물러 퇴역 위기에 몰렸었으나, 페탱의 천거로 [[소령]]으로 진급하게 된다. 이때까지만 해도 페탱과 드골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나, 1938년 드골이 페탱의 원고를 무단 수정해 자신의 이름으로 저서를 발간한 일로 관계는 단절된다. 그럼에도 미운 정은 남아있는지 훗날 페탱이 [[나치 독일]]의 괴뢰정부 [[비시 정부]] 수립의 주동자로서 재판을 받을 때 페탱에게 "한때 저의 상관이자 모범이었던 각하. 그런 각하는 어디로 사라지셨습니까?"라며 한탄하고, 구명운동을 벌여 [[사형]]이 아닌 [[무기징역]]으로 낮춰 페탱의 목숨을 구했다. 여하튼 이런 드골의 행동은 페탱 원수를 숭상하던 당시 [[프랑스군 #s-5.1|프랑스 육군]]의 상층부의 미움을 사 [[대령]] 진급이 2번이나 누락되거나, 드골이 맡은 [[기갑]]부대인 507 부대를 당시 [[메스(프랑스)|메스]](Metz) 군관구 사령관인 [[앙리 지로]]의 훈련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해체시켜 버리는 등 전방위 견제를 받게된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 발발 직전 드골은 전차를 집단운용하는 기갑사단 4개, [[기계화보병]]으로 구성된 정찰여단,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[[포병]]과 [[근접항공지원]]의 원활화를 위해 통신/보급 능력을 갖춘 독자적 활동이 가능한 최대 10만 명 규모의 기동군을 최고사령부 직할 전략예비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.[* 당시 기동전에 대한 이해가 가장 높았다던 독일 국방군조차도 보수파들의 반발로 기갑군 창설 대신 "클라이스트 기갑집단"이란 애매한 형태로 임시 편성했었다. 자세한 내용은 [[프랑스 침공]] 문서에 있다.] 그러나, [[마지노 선]]을 맹신하던 군 보수파들은 물론 기동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시피 한[* 당시 프랑스군 수뇌부는 '전차란 보병 부대의 진격을 따라 이동하며 장애물을 제거하는 이동 포대' 수준의 사고가 지배적이었다.][* 하지만 실제로는 전차 자체가 참호전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다시 말해 기병이 진격하여 보병을 밟아버리는 전통적인 전술의 연장선으로 만든 것이다.] 군 수뇌부에 의해 무시된다. 결국 기갑사단은 드골과 소수의 소장파 장교들의 발악에 가까운 노력으로 [[프랑스 침공]] 직전 간신히 창설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